서론: 수치한정발명의 전략적 가치와 법적 과제
수치한정발명은 제약, 재료 과학, 화학 등 기술 집약적 산업에서 기존 기술을 미세하게 조정하여 획기적인 성능 개선을 이룰 때 그 혁신을 보호하는 핵심적인 법적 도구입니다. 이는 발명의 구성요소를 특정 수치나 범위로 한정하는 것으로, 후속 개량 발명을 보호하고 기업의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수치한정발명은 특허받을 만한 창의적 발견과, 해당 기술 분야의 통상의 기술자라면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통상적인 최적화 사이의 경계를 구분해야 하는 본질적인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특정 수치범위에서 예측 불가능한 현저한 효과가 나타난다면 보호받아야 할 기술적 창작물이지만, 단순히 최적의 조건을 찾아내는 것은 발명으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복잡성은 대한민국,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국의 특허청과 법원이 서로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어 더욱 심화되며, 이는 글로벌 기업에 심각한 도전 과제를 제기합니다.
제1부: 대한민국 특허법상 수치한정발명의 법적 프레임워크
한국 특허법에서 수치한정발명에 대한 체계적인 법리는 대법원 2001. 7. 13. 선고 99후1522 판결을 통해 확립되었습니다. 이 판결은 수치한정발명의 진보성 판단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하며, 기존 기술의 정량적 개선 역시 특허 제도의 보호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공식화했습니다. 수치한정발명은 발명의 기술적 특징이 물리적 특성, 화학 조성물의 성분 함량, 공정 조건 등을 특정 수치 또는 수치범위로 한정하는 발명을 총칭합니다.
신규성 판단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출원발명의 수치범위가 선행기술에 개시된 더 넓은 수치범위 내에 완전히 포함되는 경우(예: 출원 10-20%, 선행 5-30%), 이는 선택발명 형태의 하위개념으로서 신규성이 인정됩니다. 반대로 출원발명이 선행기술의 좁은 범위를 포함하면 신규성이 부정됩니다.
가장 중요한 관문인 진보성 판단에서, 한국 법원은 오랜 기간 ‘임계적 의의’라는 전통적 법리를 적용해왔습니다. 이는 한정된 수치범위의 경계를 전후하여 효과의 질적 또는 양적 변화가 뚜렷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선행기술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효과가 발생하는 ‘이질적 효과’ 또는 ▲효과의 정도에 있어 예측 가능한 연속적 개선이 아닌, 한정된 수치범위의 ‘경계’에서 급격하고 비약적으로 나타나는 ‘양적으로 현저한 효과’가 있을 때 인정됩니다. 이러한 임계적 의의는 출원 시 제출하는 명세서에 명확히 기재되어야 하며, 출원 후에 제출된 실험 데이터만으로는 진보성을 입증할 수 없다는 엄격한 증거법칙(특허법원 2009. 5. 22. 선고 2008허1722 판결)이 적용됩니다. 이는 미국 실무와 뚜렷이 대조되는 점으로, 한국 출원 시에는 R&D 단계부터 충분한 비교 실험 데이터를 확보하여 명세서에 완벽히 구현해야 하는 ‘선행적 입증’ 의무가 부과됩니다.
이러한 전통적 틀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 대법원 2022. 1. 13. 선고 2019후12094 판결입니다. 이 판결은 ‘임계적 의의’가 없더라도, 선행기술의 전체적 맥락을 고려하는 ‘전체적 접근’을 제시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출원발명의 점도 범위(0.003∼3 poise)는 선행발명의 넓은 범위(“100 poise 이하”)에 포함되었지만, 대법원은 출원발명의 낮은 점도를 적용하면 선행발명의 목적인 ‘안정적인 응고 피막 형성’이 불가능해져 선행발명의 ‘기술적 의의가 상실’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선행발명이 특정 성분 함량을 ‘피해야 한다’고 기재한 것을 ‘부정적 교시’로 해석하여, 통상의 기술자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동기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판결로 인해 “왜 통상의 기술자가 이 길을 택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기술적 서사를 통해 진보성을 주장할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명세서 작성 시에는 한정의 이유와 효과, 재현 가능한 실험 방법 등을 상세히 기재해야 하며, 특히 임계적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청구범위 경계값에 근접한 비교예 데이터 제시가 매우 효과적입니다. 권리 집행 단계에서는 문언 침해를 벗어난 균등론 적용이 ‘의식적 제외’ 법리에 따라 매우 어렵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제2부: 국제적 실무의 비교 분석
글로벌 시장에서 수치한정발명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상이한 실무를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USPTO)은 출원발명의 수치범위가 선행기술과 중첩되거나 근접할 경우, 일단 ‘일견 자명(prima facie obviousness)’하다고 추정하고 입증 책임을 출원인에게 넘깁니다. 출원인은 출원 후에도 제출 가능한 선언서(Declaration)를 통해 ‘예상치 못한 결과’를 입증하여 이를 반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구항을 보정할 때 명세서에 근거가 없으면 ‘신규사항(new matter)’ 추가로 간주될 수 있으므로, 최초 명세서에 다양한 하위범위를 명시하는 전략이 중요합니다.
유럽(EPO)은 ‘선택발명’ 개념을 적용하며, 신규성은 선행기술로부터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개시되었는지를 따지는 ‘골드 스탠더드’ 원칙에 따라 판단합니다. 진보성은 가장 가까운 선행기술을 기준으로 발명이 해결하는 ‘객관적인 기술적 과제’를 설정하고, 그 해결책(수치 한정)이 자명했는지를 판단하는 체계적인 ‘문제 해결 접근법’을 사용합니다. 이 과정에서 수치 한정에 의해 달성되는 ‘기술적 효과’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일본(JPO)은 한국의 전통적 법리와 매우 유사하여, 한정된 수치범위 내에서 이질적이거나 ‘현저한 효과’를 요구하며, 특히 해결 과제가 동일할 경우 ‘임계적 의의’를 입증해야 합니다. 또한 명세서의 뒷받침 요건과 실시가능 요건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출원 후 데이터 제출만으로 명세서의 결함을 치유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성공적인 글로벌 특허 전략은 어느 한 국가가 아닌, 모든 주요국의 가장 엄격한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최소공배수’ 전략, 즉 모든 요건을 충족하는 단일의 ‘글로벌 표준 명세서’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제3부: 최전선의 쟁점: 인공지능과 수치한정발명의 융합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은 수치한정발명 분야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인간 연구자가 생각지 못했던 최적의 수치범위를 신속하게 식별해내며 발명 과정을 가속화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진보성 판단의 기준이 되는 가상의 인물인 ‘통상의 기술자’의 능력을 상향 평준화시킵니다. 과거에는 과도한 실험을 거쳐야 했던 최적화 과정이 AI를 통해 쉬워지면서, AI를 이용해 얻은 단순 최적 수치범위는 더 이상 비자명한 발명으로 인정받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술 발전이 발명을 가속화하지만, 그 결과물의 특허 획득은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AI 특허성 역설’을 낳습니다.
또한 AI의 창의적 기여가 커지면서 “누가 진정한 발명가인가?”라는 논쟁이 ‘다부스(DABUS)’ 사건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촉발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미국, 유럽 등 주요국 법원은 발명자는 ‘자연인’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AI 자체는 발명자가 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AI를 활용해 발명을 완성한 경우, 특허 명세서에 어느 수준까지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지가 새로운 쟁점입니다. EPO의
T0161/18 결정은 AI 모델 훈련에 사용된 ‘입력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으면 실시가능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기업의 핵심 영업비밀인 훈련 데이터셋의 공개 여부를 둘러싼 특허 전략과 영업비밀 보호 전략 간의 충돌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결론 및 전략적 제언
수치한정발명은 기술 혁신의 가치를 보호하는 핵심 수단이지만, 한국 법리의 진화와 주요국의 상이한 기준으로 인해 그 법적 지형은 매우 복잡합니다. 여기에 AI 기술의 등장은 ‘통상의 기술자’ 개념을 흔들고 새로운 법적 과제를 제시하며 특허 제도의 변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전략이 요구됩니다. 첫째, R&D 초기 단계부터 IP 전략을 긴밀히 연계하여, 한국의 ‘임계적 의의’, 미국의 ‘예상치 못한 결과’, 유럽의 ‘문제 해결 접근법’ 등 각국의 가장 엄격한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글로벌 표준 명세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둘째, AI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최적화 범위를 넘어, 혁신을 가능하게 한 새로운 AI 모델 자체나 AI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이질적 효과를 내는 발명에 보호 역량을 집중하는 방향으로 특허 전략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셋째, AI 관련 정보 공개 의무에 대비하여 특허를 통한 보호와 영업비밀을 통한 보호 사이에서 명확한 내부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결국 기술적 통찰과 법적 전략을 정교하게 결합하는 것만이 미래 혁신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마련하는 길입니다.